조선시대 갑옷 - 조선왕조실록 기록

이러닝 | 2007/08/02 15:15 | Posted by dr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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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한 글들을 발췌하여 제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제가 역사학자나 한학자가 아니기에 제 생각에는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혹시 이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갑옷'으로 검색한 결과 734건의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그중 세종때 기록이 103건, 성종때 기록이 93건, 중종때 기록이 53건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비교적 국가가 강성한 시기에 군비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먼저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조선은 책만 잃은 문약한 국가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조선시대 성종 때까지만 해도 국방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으며 결코 허약한 군대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나 이괄의 난과 이시애의 난등을 거치면서 성종이 후 국력이 급격히 약해진 듯 보인다. 흔히 우리는 임진왜란 때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천으로된 군복만 입고 전투를 치루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중앙군 뿐만아니라 지방군들도 개인이 준비하거나 또는 무기고에 비축된 갑옷(엄심갑, 경번갑, 쇄자갑, 피갑등)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중앙군은 두정갑이나 쇄자갑, 지방군은 흉갑을 주로 착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기 전투의 연속적인 패배로 많은 부분이 망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 해봐도 천옷만 입고 전투에 나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만약 나보고 목숨이 걸린 칼싸움 하러 나가라고 한다면 두꺼운 옷을 몇벌 껴입던지 하다못해 짚이나 나무판이라도 몸에 두르고 나갔을 듯하다.

  그리고 갑옷 과 병장기들의 유물이 극히 적은 것은 조선 후기에 진입하면서 총포의 발달로 사용이 줄고, 간혹 왕조 실록의 기록을 보면 몰래 병장기를 내다 팔아 벌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는 걸 봐서 가세가 어려운 집들은 내다 팔거나,  구한말 나라가 기울고 외세의 침략이 늘면서 남아있는 것들도 대부분 망실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 초기에는 종이로 만든 지갑(紙甲)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청색의 엄심갑(흉갑)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이며  이런 엄심갑이 조선 후기에까지 중요한 갑옷의 형태중 하나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를 기록한 에스파냐 신부의 묘사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또한 '수륙의 군사가 말하기를' 이 부분을 보아 수군도 갑옷을 착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태종 12권, 6년( 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윤7월 14일 신미 1번째기사
여러 도의 갑옷 색깔을 백색에서 청색으로 바꾸다
.

풍해도 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 신호(申浩)가 상언(上言)하기를,

 
“수륙(水陸)의 군사가 항상 말하기를, ‘연례(年例)로 쓰는 군기(軍器) 가운데 지갑(紙甲) 은 본래 빛깔이 없고 좀이 먹기 쉬우며,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다 실용 가치가 없다.’합니다. 만약 청색 엄심(掩心) 으로 대신한다면, 빛깔도 있고 견실하여 접전(接戰)할 때에 창과 화살이 깊이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 국가는 동방에 있어 청색을 숭상함이 마땅하오니, 만들기도 쉽고 이를 쓰면 실용 가치도 있으며, 또 좀이 먹어 망그러지는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하므로, 드디어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조선군의 기본 무장은 투구, 갑옷이나 엄심갑, 그리고 환도로 보이며  병종에따라 활이나 창등을  휴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1패에 살수(창병)와 궁수의 비율이 2:3으로 궁수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병력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것은 조선군의 주 전투방식이 창검을 휘두르는 근접전 보다는 활을 이용한 원거리 전투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종 93권, 23년( 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6월 8일 계유 3번째기사
정군·봉족·잡색군을 가려 군적을 바르게 할 것에 관한 병조의 정문

경외(京外)의 대소 인원(大小人員)들의 각거 노자(各居奴子)들도 역시 군적(軍籍)에 등록하여 모두 군기(軍器)를 갖추게 하였다가, 만일 위급(危急)한 때를 당하면 임시(臨時)해서 조발(調發)하게 하되, 그 조발하는 해에는 공천(公賤)이면 공납(貢納)을 받지 말게 하고, 사천(私賤)이면 12월까지 한(限)하여 잡역(雜役)을 면제하게 하여, 시위(侍衛)·영진(營鎭)·기선(騎船) 등의 정군(正軍)으로 한 집안에 솔정(率丁)의 수가 적으면, 비록 각거 노자(各居奴子)가 있더라도, 만약 그 상전이 종군(從軍)하게 되었다면 따로 뽑아 정하지 말고, 그대로 상전의 호[主戶]에 소속시켜 군호(軍戶)를 충실하게 할 것이며, 각 고을에도 역시 군기소(軍器所)를 두게 하고, 매양 농사의 여가에 수령(守令)이 경내(境內)의 각색 군인(各色軍人)으로 하여금 관(官)의 양식(樣式)에 의하여 병기(兵器)를 만들어 주되, 매 1호(戶)에 투구[胄] 하나, 혹은 갑옷[甲], 혹은 엄심갑(掩心甲)하나, 환도(環刀) 하나를 주고, 궁전(弓箭)은 1패내(牌內)에 5분의 3이 갖게 하고, 창(槍)은 5분의 2가 갖게 하여, 그 준비해 가진 바에 따라 항상 점검(點檢)하게 하소서.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때의 기록에도 엄심갑 천여벌 이상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광해 82권, 6년( 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9월 13일 임술 7번째기사
비변사가 엄심갑·투구를 서북도로 나누어 보내는 일에 차관을 정하도록 아뢰니 따르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여러 도에 배정한 엄심갑(掩心甲)과 투구가 올라온 뒤에 서북도(西北道)로 나누어 보낼 참인데, 지금 서울에 모인 숫자가 1천여 벌입니다. 서북도에 각각 보낼 5백 벌을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으며 일을 아는 차관(差官)을 별도로 정한 다음 그에게 말을 지급하여 가지고 들어가게 하고 그 나머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들은 도착하는 대로 보내야겠습니다.”



엄심갑에 이어 등장한 갑옷은 경번갑, 쇄자갑(클릭)이며 세종실록에 그림으로 까지  남아있는 걸보면 아마도 조선 중앙군의 주력 갑옷으로 추정된다..

태종 28권, 14년( 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11월 4일 계묘 1번째기사
경번갑을 만들지 않은 죄로 군기감 관원을 파직시키다
 군 기감(軍器監) 부정(副正) 최해산(崔海山)·판관(判官) 양회(梁淮)·직장(直長) 손군달(孫君達)·녹사(錄事) 윤근(尹謹)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최해산에게 명하여 중국의 경번갑(鏡幡甲) 을 감독하여 만들어서 장차 각도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였는데, 최해산이 스스로 감독하여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감(本監)에서 일찍이 두두미갑(豆豆味甲) 8부(部)와 별철갑(別鐵甲) 3부(部)를 월과(月課)로 하였으나, 이를 중지하도록 명하고 쇄자갑(鎖子甲) 3부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또 병조에 명하였다.
“각도의 월과(月課) 갑옷은 일찍이 보낸 견본[見樣]에 의하여 견고하고 치밀(緻密)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 중에 법식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죄주겠다.”

 임금이 말하였다.
“가 죽으로 갑(甲)을 꿴 것은 여러 해가 지나면 끊어져버리니, 또 수선하도록 하면 그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다. 또 녹비(鹿皮)를 재촉하여 바치게 하는데, 그 수도 적지 않다. 내가 생각건대, 철(鐵)로써 꿴다면 썩지 않고 단단할 것이니, 폐단도 따라서 없앨 수 있다.”
임금이 또 말하였다.
“이제 동지(冬至)에 각도에서 바치는 철갑(鐵甲)은 아직도 가죽을 사용하여 짜고 꿰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하다. 이제부터 뒤로는 방물(方物)도 또한 견본[見樣]에 따라서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군장을 개인이 준비하게 함으로써 전란시 하번 즉 제대한 군사들도 갑옷등 군장을 갖추고 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세종 6권, 1년( 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16일 병술 5번째기사
각도의 갑사와 별패도 군기와 갑옷을 사사로 장만하게 하다

 전라도 도절제사가 계하기를,
 
“도 내의 각색 군정(各色軍丁)은 군기(軍器)와 옷·갑옷을 모두 사사로 장만하는데, 홀로 갑사(甲士)와 별패(別牌)는 사사로 준비하지 않고 상번(上番-입대) 할 때 군기감에서 받습니다. 하번(下番-제대) 하여 시골에 있을 때 국경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맨손으로 전장에 나갈 것이 뻔합니다. 전일에 동으로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도 각색 군사는 모두 사사로 군장(軍裝)을 준비하였는데, 유독 갑사와 별패 등은 선군의 것을 빼앗아 갔으니 실로 미편합니다. 갑사와 별패도 사사로 군장을 준비하게 하고 하번할 때마다 엄하게 점검하여 뜻밖에 일어나는 변고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세종 49권, 12년( 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8월 3일 신미 2번째기사
갑옷·투구 등을 수선하고 정련할 것을 명하다  
 
도총제 박실(朴實)이 아뢰기를,
 
“숙 위 군사(宿衛軍士)가 착용하는 쇄자갑(鎖子甲)은 그 품이 몹시 좁고 또 많이 파손되어, 중국의 사신을 대하기가 몹시 무색하오니 마땅히 빨리 수선할 것이요, 또 군기감(軍器監)의 월과 군기(月課軍器)도 우선 그 수효를 줄이고, 먼저 파손된 갑옷을 수선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수선할 힘이 족히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태만하고 소홀한 까닭이다. 갑옷뿐만이 아니라 투구도 역시 정련(精鍊)되어 있지 않아서 전연 군사의 위용이 없으니 마땅히 속히 수선토록 하라.”
 
하고, 병조 판서 조계생(趙啓生)에게 명하여 이를 고찰하게 하였다

역시 세종대왕께서는 국방에도 매우 관심이 컷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세종 125권, 31년( 1449 기사 / 명 정통(正統) 14년) 8월 16일 계해 2번째기사
가정군 징집시 민간에 끼치는 폐가 크므로 방책을 강구하다
이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정창손(鄭昌孫)이 아뢰기를,

“금번에 듣자오니 각도에서 가정군(加定軍)을 징집하는데 매 호(戶)마다 기복(騎卜)과 의갑(衣甲)을 갖추게 하면서 기한을 심히 촉박하게 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전택(田宅)을 모두 팔게 되어 극히 소요(騷擾)하다 합니다. 옛적에 태왕(太王)은 적인(狄人)을 섬겼고, 정(鄭)나라는 제(齊)·초(楚) 두 군데로 섬겼는데, 지금 야선(也先)이 병세(兵勢)가 몹시 성(盛)하여 중원(中原)을 엿보고 있으니, 그 뜻이 작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병세(兵勢)가 서로 대적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번에 편호(編戶)한 군정(軍丁)은대개가 모두 잔렬(殘劣)하니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또 야선(也先)이 중국에 뜻이 있으므로, 반드시 군병을 분리시켜 원군(援軍)도 없이 멀리 와 우리 변방을 침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선(也先)을 관찰해 보면 뜻과 생각이 크고 깊으며 거사(擧事)를 신중하게 하는데, 만일 우리를 침범하면 다시 하나의 적(敵)이 생기게 되므로,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니, 청컨대, 기한을 넉넉히 하여 백성의 생활을 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인심이 오로지 고식(姑息)만을 일삼아, 정부 대신(政府大臣)까지도 모두 강무(講武)·대열(大閱)·염초(熖焇)·총통(銃筒) 등 모든 군사(軍事)에 관계된 일은 폐단이 백성에 미친다 하여, 즐겨 미리 준비하려 들지 않지만, 내가 무비(武備)는 군국(軍國)의 중사(重事)이므로 비록 작은 폐단이 있더라고 진실로 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사(無事)한 때를 당하여 반드시 예비해야 되겠다. 이번에 중국의 성식(聲息)을 인하여 민정(民丁)을 징집해서 군병(軍兵)을 실(實)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민간의 소요(騷擾)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내 장차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하였다.
 



세종때 재미난 기록중 하나는 도적들도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기록이다.


세종 114권, 28년( 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0월 17일 신해 1번째기사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대성산의 도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아뢰도록 유지하였다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도 내(道內)에 도적이 흥행(興行)하여 대성산(大城山)에 떼지어 모여서, 갑옷을 입고 병기(兵器)를 가지고 공공연히 다니면서 겁략(劫掠)하고, 영리(營吏)와 아전(衙前)들과 내통 공모하여, 관청에서 이를 체포하고자 하나 문득 도망하여 피하게 되니, 이와 같은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세력이 성하여 당여(黨與)가 이루어지면 작은 일이 아니다. 잡는 방략(方略)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비밀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때 기록을 보면 날씨가 더우니 시위군에게 갑옷을 입지 말라고 지시하는 기록도 있는 걸 봐서 시위군이나 왕을 호위하는 금군들이 갑옷을 계속 착용한 걸로 보인다. 하지만 성종 이 후 금군들은 행사때도 갑옷을 잘 착용하지 않은 모양이다.


중종 75권, 28년( 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6월 27일 무술 1번째기사
금군도 갑주에 칼을 차고 호위케 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평 상시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이 진상(進上)하고 하직하려 숙배(肅拜)할 때 문을 지키는 군사와 데리고 온 사령(使令)은 모두 갑옷을 갖추고 옹위하는 것이 예데, 지금은 단지 궐정(闕庭)에서 숙배할 때만 문을 지키는 군사를 두고 있다. 이렇게 하면 왜인이나 야인이 궐정을 엄숙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요, 궐정이 엄숙하지 않으면 경홀히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금군(禁軍)일지라도 모두 갑주(甲胄)에 칼을 차고 호위하고 서서 엄숙함을 보이도록 예조와 병조에 이르라.”

성종 이후 군기가 많이 해이해진 듯 보인다

중종 82권, 31년( 1536 병신 / 명 가정(嘉靖) 15년) 7월 12일 을축 1번째기사
대열할 때 백관들도 병기와 갑옷을 갖추라 명하다
 
전교하기를,
 
“이 달 안으로 선전관(宣傳官)들을 보내어 징병(徵兵)하게 하라. 성종조(成宗朝) 때는 대열(大閱) 장소에서 백관(百官)이 병기와 군복을 갖추고 점검을 받았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 군사들은 병기와 군복을 이미 다 갖추었겠지만 백관들이야 어떻게 다 갖추었겠는가. 폐조(廢朝)17815) 때 첩종(疊鐘)17816) 할 적에도 서울 안이 시끄러웠는데 이처럼 태평할 때에 갑자기 병기와 군복을 갖추라고 한다면 여염(閭閻)에 소요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는 우선 편의에 맞추어 병기와 군복을 갖추는 것은 제외하는 것이 어떨는지를 사관(史官)을 보내어 삼공에게 하문하여 가부를 아뢰라.”
 
하였다. 영의정 김근사 등이 의논드리기를,
 
“나 라의 큰일은 제사(祭祀)와 융사(戎事)입니다. 교 련과 열병의 정령(政令)이 법령 전적에 실려 있는데 지금은 태평에 젖어 조정 신하들이 모두 병기와 군복이 없으니 급작스러운 변에 대비하는 자세가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편안할 때에 급난에 대비한다.’는 뜻에 매우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까닭없이 첩종하여 갑자기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만든다면 과연 소란해질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군정(軍政)이 매우 해이해졌기 때문에 처음으로 무사(武事)를 강습하는 판국인데, 또 임시 편의에 따라 병기와 군복을 제외한다면 고식적인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영영 대열의 영전이 폐지되어 끝내 병기와 군복을 갖출 때가 없게 될 것이니 일체 법전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10월 11일 대열할 때에 백관들도 병기와 군복을 갖추는 일로 승전(承傳)을 받들도록 하라.”

갑옷과 병장기들에 관한 관리 문제가 성종 이후 종종 기록에 보인다. 아마도 임진왜란때는 실제 사용할 수 없는 병장기나 갑옷이 많았을 수도 있을 듯하다.
 
중종 36권, 14년( 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9월 3일 갑오 4번째기사
전주 부윤 이사균이 군액이 많음 등을 상소하니, 내용이 형식만 많고 실속은 적다고 이르다
 백 시렁이나 쌓아놓은 활은 그 백 시렁의 것이 단 열 벌도 쓸 수가 없고, 열 부(部)씩 철해 놓은 갑옷은 열 부 중에 하나도 입을 것이 없습니다. 화살·창·투구·병장(兵杖)을 보아도 모두 그러하여 수효만 수천 수백씩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장차 어디다 쓰겠습니까? 신은, 쓸데없는 기구들은 모두 버리고, 힘을 들여 정밀하게 제작하여 어느 것이나 쓸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지 금 사방에 걱정되는 것이 없어 병혁(兵革)을 거둔 지 오래되어, 장수나 사졸들이 게을러져 위사(衛士)는 탈 만한 말이 없고 수병(戍兵)은 쏠 만한 활이 없습니다. 매양 점열(點閱)을 받게 도면 교대하여 서로 빌어 쓰는데 하루 빌어 점열 받는 말의 삯이 베가 한 필이나 되고, 투구·갑옷·활·화살은 부서진 것이 아니면 부러진 것이건만, 수령들은 말하기를 ‘그것은 본래부터 풍습이 된 것이어서 내가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니, 고치려다 비방을 초래하는 것보다는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 또한 태평한데 무슨 외부의 침범이 있겠는가?’ 합니다. 수사(水使)도 같은 사람들이고 병사(兵使)도 또한 그러하여, 모두 군사들을 무마(撫摩)는 해야 하지만 너무 안일하게 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니, 가령 한 모퉁이에서 사변이 생긴다면 비록 한신(韓信)과 백기(白起)9465) 로 장수를 삼은들 어찌 맨손으로 적을 방어하고 맨몸으로 선봉(先鋒)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임진왜란(1592-1598)을 겪으면서 국방에 다시 관심을 가지지 시작한듯...여기서 재미난 내용은 갑옷을  입고 호를 뛰어넘는 훈련이 있었다.는 옛 이야기를 한다.  이 기록이 1594년 임진왜란중의 기록이니 당시의 조선 군사들도 이와 비슷한 훈련을 받았을 것이며 천옷만 입고 싸우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기록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조 50권,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4월 10일 무오 1번째기사
정병의 조련 법을 정원에 하교하여 훈련 도감에 이르게 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요 즘 병조(兵曹)가 훈련을 부지런히 시키고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나라를 위해 직분을 다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훈련도 부지런히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대를 정하게 고르는 일이다. 지금 용잡(冗雜)하고 용기 없는 자들을 잘 가리지 않고 그대로 항오(行伍)에 편입시켜 편안히 앉아서 총 쏘고 칼을 시험하게 하는 것은 이른바 군대를 훈련시키는 방법이 아닌 듯하다.
 
옛 사람들은 군대 훈련에 있어 정병(精兵)에 주력하였고 많은 것을 요하지 않았다. 악비(岳飛)의 군대가 소수로 많은 적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정하게 골라 남달리 훈련을 더 시켰기 때문이다. 그 법은 활은 반드시 좌우(左右)로 쏘게 하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호(濠)를 뛰어넘도록 날마다 교련시켰으니 그것은 날쌔고 힘이 쎈 사람이 아니고는 못하는 일이다. 옛사람 중에 또 발에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그것을 점점 더 무겁게 하는 방법으로 군대를 교련시켰던 자도 있었다. 척계광(戚繼光)은 ‘군대는 모름지기 뛰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였는데, 《신서(新書)》에도 연족법(鍊足法)과 연신법(鍊身法)이 있어 군대를 교련하는 기술도 다양하다. 거기 비하면 지금의 교련법은 어딘가 미진한 것 같다.
 
내 생각에는 크게 한번 추려 내어 몸이 약한자, 힘이 세지 못한자, 몸 놀림이 둔한 자, 발이 무거운 자, 나이가 많은 자들을 모두 도태하고 건장한 자들만 뽑은 다음 또 반드시 뛰기·걷기 등을 익히도록 해야할 것 같다. 또 전일 가르치던 독화(毒火)·독시(毒矢)의 법도 그것이 쓸모 없는 것이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전습(傳習)시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로는 이에 관하여 들은 바가 없는 듯하다. 이 뜻을 훈련 도감(訓鍊都監)에게 이르라.”

 
광해군때 왜란으로 망실된 병장기의 복구에 대한 기록이다.
광해 80권, 6년( 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7월 20일 경오 6번째기사
비변사가 투구와 갑옷의 제작에 대해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난 리를 겪은 이후로 여러 종류의 군기(軍器)들이 남김없이 유실되었고, 이리저리 수습하여 겨우 모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은 활뿐입니다. 몇 년 전부터 조정이 화기(火器)에 각별히 뜻을 두고 갖은 방법으로 제조하였으나 그 수량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투구와 갑옷에 있어서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힘이 미칠 겨를이 없어, 안으로는 무고(武庫)와 밖으로는 열읍(列邑)에 이르기까지 비축한 수량이 매우 적으니 혹시라도 갑작스런 변고가 있을 경우 적을 방어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신들이 지금 우려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 일에 미치니 매우 지당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현재 물력이 탕진되어 대포를 제조할 때에 당연히 들어야 될 물자도 계속 조달하기 어려워 걱정스러우니, 갑옷과 투구도 동시에 제조하기는 사세상 안 될 것으로 여깁니다. 전일 본사가 중국의 양식에 따라 갑옷과 투구를 특별히 제작하여 각도 감사·병사에게 나누어 보내고 그 양식에 따라 제조하여 급박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자는 일로 재가를 받아 해당 도에 지시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지금 그 지시에 따라 시행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적당한 수량을 마련하여 각도의 감사·병사·수사에게 나누어 보내, 시한을 정하여 완전하게 제조하고 최대한 견고하게 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변고가 생긴 지역으로 이송하여 쓰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후기까지도 철제 갑옷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조 58권, 19년( 1743 계해 / 청 건륭(乾隆) 8년) 7월 13일 계사 1번째기사
금군 별장과 육번 장군의 갑옷이 간혹 철제가 아니라 하여 금군 별장을 벌주다



[HISTORY] - 조선시대 군사제도
[HISTORY] - 조선시대 갑옷
[HISTORY] - 조선후기 군사제도-오군영과 기타 군사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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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ellydancespringfield.com 고명진 2012/01/10 2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2. Favicon of http://creationsmijoetpixel.com 2012/01/13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전체에 서있다면 당신은 파고있어, 당신은 파고를 중지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