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실록에서 의빈 성씨와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에 관한 글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결과를 보면 정조 6년에 상의(尙儀-내명부 정5품 상궁과 같은 직급)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음으로써 소용(昭容- 내명부 정3품의 위호를 가지는 임금의 후궁)으로 봉해지며,정조 7년에 의빈의 칭호가 내려진다. 그리고 정조 8년에 옹주를 출산하며,정조10년에 문효세자의 장례를 치르고, 두달이 채 안되어서 의빈 성씨가 사망한다.

참고)궁녀의 조직과 명칭 5품까지가 궁녀(궁관), 1-4품까지 후궁(내관)
정조는 효의왕후외에 4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의빈 성씨를 제외한 세 후궁은 간택후궁이다.
원빈홍씨; 홍국영의 여동생 정조 2년에 가례, 정조 3년에 졸(卒)
화빈윤씨; 윤창윤의 딸 정조4년 가례, 정조 5년 옹주출산(일찍 사망)
수빈박씨; 박준원의 딸 정조11년 가례, 정조 14년 원자(순조) 출산, 숙선옹주출산(출산연도가 확실치 않음)

정조 6년( 1782 임인 / 청 건륭(乾隆) 47년) 9월 7일 신축 1번째기사
문효 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 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정조  7년( 1783 계묘 / 청 건륭(乾隆) 48년) 2월 19일 경진 4번째기사
소용 성씨에게 의빈의 칭호를 내리다.


정조  8년( 1784 갑진 / 청 건륭(乾隆) 49년) 윤3월 20일 을해 1번째기사
호산청을 설치하다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참고)산실청은 중전의 출산 담당을 위한 임시 관청, 호산청은 후궁의 출산을 위한 것임. 그러나 화빈,수빈의 출산에는 산실청이 설치됨.

정조 10년( 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윤7월 19일 경인 1번째기사
문효 세자를 효창묘에 장사지내다.


정조 10년( 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9월 14일 갑신 2번째기사
의빈 성씨의 졸기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정조11년에 보면 눈길을 끄는 기록이 있는데 홍언섭이라는 사람이 천안군수로 부임을 명 받았으나 가지 않아 신문을 하는 과정에서 문효세자의 죽음에 관한 글이 보인다,


 정조 11년( 1787 정미 / 청 건륭(乾隆) 52년) 2월 3일 신축 4번째기사
천안 군수 홍언섭이 임지에 가지 않자 신문하다

천안 군수(天安郡守) 홍언섭(洪彦燮)이 인수(印綬)를 던지고 돌아와 이조에 정장(呈狀)하기를,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아는 것은 임금과 아버지 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상변(喪變)은 모든 증세가 처음부터 괴상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군부(君父)의 원수입니까? 궁사(宮司)의 구료(舊僚)로서 밤중에 울부짖으며 곧바로 죽고자 하면서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으나 직급이 낮고 성의가 부족해서 이미 머리를 부수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며, 또 몸이 죽어 〈신하의〉 분의(分義)를 펴지도 못했으니, 보잘것없는 견마(犬馬)의 정성으로는 단지 물러가 구렁에 죽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임금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문을 닫고 스스로 처신하는 날이 아님이 없어 비록 방명(方命) 의 주벌(誅罰)을 당하더라도 부임할 길이 절대로 없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로 성송연(한지민 분)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드라마 상의 가상의 인물이지만 역사적 근거로 볼때 정조(이산)와 의빈과의 사랑은 아들인 문효세자의 죽음과 함께 의빈이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두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불과 5년 남짓,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그리고 문구 하나로 뭐라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정조의 죽음에 많은 의문이 있듯이,문효세자의 죽음에도 의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빈은 아들을 잃고 얼마되지 않아 임신한 상태로 사망한 것으로 보아 아들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였거나, 호산청의 설치를 산달로 미루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볼때는 의빈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빈의 죽음에도 어떤 음모가 개입되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리라 본다. 결국 정조와 의빈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 그리고 바로 이어진 임신한 의빈의 죽음으로 인해 (드라마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는 슬프고 애절한 결말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가문의 든든한 배후도 없이 왕의 사랑만으로 살아가던 한 여인이 왕의 세번째 아이를 가진채, 아들과 함께 음모에 희생되었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삶도 없지 않을까 한다.

드라마 이산의 ost '약속'의 애잔한 음율과 마지막 구절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 사진 속의 선남선녀가 5년 밖에 함께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찡하다...

'잊지 말아요 가슴 아픈 사랑이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게요"

이대론 안되나요 돌아올 길 잊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이병훈 PD는 제작노트에서 드라마 이산을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정조 대왕의 인간적인 면에 촛점을 맞추어 제작하며, 정조 대왕의 10세부터 48세 붕어 할때까지 38년간을 보여준다고 했다. 역사에 근거한다면 드라마 사상 드물게 여주인공이 중간에 사망으로 빠진 채 드라마가 계속될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의빈성씨 그 두번째 이야기

의빈성씨 그 세번째 이야기



[HISTORY] - [드라마는 드라마 역사는 역사] 정조의 즉위 과정

2007/10/03 - [지식/역사] - 드라마 이산 (정조)그 역사적 배경
[MOVIE DRAMA] - [드라마]이산 속의 의빈 성씨는 어떤 모습일까?

이병훈 감독이 이야기하는 이산의 결말 (2008년 4월 1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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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던 사람 2007/10/15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은 25년이 아마 1~2편으로 압축되지 않을지...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