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에 걸친 드라마 이산도 이제 그 여정을 끝낼 날이 멀지 않았다. 역사 드라마는 항상 역사에 관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 호기심을 따라 이것저것 과거를 되집어 보는 일은 드라마 외적인 더 큰 즐거움을 준다.
[HISTORY] - [드라마 이산] 의빈 성씨에 관하여- 슬픈 결말
기존에 역사드라마는 많았지만 정조대왕의 이야기를 다룬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드라마 이산은 시작 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 인물은 의빈성씨 다. 우리나라 역사드라마에 등장하는 왕실 여인들은 대부분이 권력의 한 축으로 묘사 되왔으며 음모와 권력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의빈은 기존의 왕실 여인과는 다른 일개 궁녀에서 세자를 출산하고 빈이 되는 신데렐라적 요소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절정기에서 갑자기 이승과 이별을 하는 러브스토리적 요소를 함께 갖춘 인물이기에 더더욱 관심이 가는 인물이었다.
의빈성씨 두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를 정리하고 약간 보충해서 글을 쓸까한다.
정조대왕에게는 효의 왕후를 제외하고 원빈홍씨-화빈윤씨-의빈 성씨-수빈박씨 4명의 후궁이 있었다. 원빈 홍씨는 홍국영의 동생으로 정조 2년 어린 나이에 후궁으로 들어와 1년만에 사망하고, 정조 4년에 화빈 윤씨가 들어온 뒤 화빈 윤씨의 지밀나인 이었던 궁인성씨가 문효세자를 임신함으로 세번째 후궁이 된다. 수빈 박씨는 정조 14년 에 순조를 낳는다. 지밀나인은 왕실 사람들을 지근에서 모시는 비서 같은 존재이며 하급 궁녀 중에서는 비교적 높은 위치의 여인들이다.
의빈 창녕 성씨는 화빈의 지밀나인이었으며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이는 영조29년(1753년7월8일) 생으로 33세에 요절하였으니 정조대왕(1752)과 나이가 비슷하다. 의빈 성씨에 관련된 왕실 기록을 잠시 살펴 보면
- 정조 6년 1782년 9월 7일 문효세자 출산. 이때 정조대왕은 궁인 성씨를 소용으로 봉한다 하였으나 12월 서명선의 건의가 있기까지 소용 칭호를 내리지 않는다.
- 정조 6년 1782년 12월 28일 성씨가 영의정 서명선의 건의로 소용으로 봉해지다
- 정조 7년 1783년 2월 19일 소용 성씨가 의빈으로 봉해지다.
- 정조 8년 1784년 3월 20일 의빈 성씨가 딸을 낳았기에 호산청을 설치한다.
- 정조 8년 1784년 7월 2일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 (참고 ;드라마에서는 대신들이 반대하였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왕세자로 봉해지고 동시에 빈의 호칭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 빈으로 봉해진 것이 먼저다.)왕세자 책봉식은 8월2일 거행됨.
보양관(輔養官)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경사스러운 복록(福菉)이 끝이 없어서 큰 운수가 바야흐로 도래하시니, 이에 길(吉)한 달과 아름다운 날에 원자(元子)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은 비록 정해졌지만, 예의(禮儀)를 아직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두 분 자성(慈聖)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뜻을 받들지만, 자전(慈殿)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성대한 예식을 빨리 거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중략)
영의정 정존겸(鄭存謙), 영부사 김상철(金尙喆), 판부사 서명선(徐命善)·이휘지(李徽之)·홍낙성(洪樂性)이 잇달아 차자(箚子)와 상소를 올려 책봉 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중략)
“이것은 실로 종묘 사직의 큰 계책이다. 내가 어찌 허락하기를 꺼리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원자를 세자로 삼도록 하라.”하였다. - 정조 10년 1786년 5월11일 왕세자가 훙서하였다.
- 정조 10년 1786년 9월 14일 의빈이 졸 하다.
그리고 정조 14년까지 묘에 정조대왕이 몇차례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고종, 순종 때 의빈 성씨 사당에 관한 기록이 일부 남아있다.
기록을 통해 의빈성씨의 삶을 살펴보면 정조 4년 1780년 3월 화빈윤씨의 후궁 책봉으로 화빈윤씨의 지밀 나인이 되었으며 나이로 보아 궁에 들어 온지는 오래된 여인으로 생각된다. 문효세자의 출생년도로 볼 때 그 이듬해 정조 5년 1781년 정조의 승은을 입고 상의(특별상궁)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782년 문효세자가 탄생하고 소용으로 봉해졌다가 , 1783년 비로서 정1 품 의빈의 칭호를 받게된다 . 이 후 정조 8년 1784년에 옹주를 한 명 더 출산하는데 첫 돌이 되기 전에 사망한 탓에 출산기록 외에는 이름도 기록도 없다. 그리고 1786년 초 다시 임신을 하는데 그해 5월에 문효세자가 사망하고, 같은 해 9월 의빈성씨 역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지밀나인 출신의 의빈성씨에 대한 대우를 보면 다른 정조대왕의 간택 후궁들과는 다르다. 다른 후궁들은 뼈대있는 양반 가문의 자녀들이었으며 정식 가례를 치루고 후궁이 되었고 임신시에도 중전의 예우에 해당하는 산실청이 설치된다. 이에 반해 의빈 성씨는 드라마에서 처럼 가례를 올린 기록도 없고, 출산시 호산청이 설치되며, 세자를 출산하고도 한참 뒤에야 의빈으로 봉해진다. 이로 미루어 볼때 의빈 성씨의 출신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년 남짓한 기간에 의빈성씨는 3명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사 후에 장사는 갑신년(영조40년) 후정의(=후궁) 의 1등의 예로 치루라 하였으며, 효창묘에 문효세자와 함께 매장하도록 배려한 점, 마지막으로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궁을 만들어 의빈 성씨의 신위를 모시게 한 점으로 미루어 생전에 의빈성씨를 다른 어떤 후궁 보다도 자주 찾고 아꼈음을 알 수 있다. (의빈궁은 후에 칠궁에 속하게 된다.)또한 의빈의 '宜' 자는 마땅할 의 또는 화목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정조대왕이 의빈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면 묻다, 제사라는 의미도 있어 의빈의 요절과 묘하게 관련된 면도 있다.)
아무래도 정략적으로 들어 온 간택 후궁보다는 정조가 직접 선택한 여인이었기에 사랑일지 아닐지는 몰라도 보다 많은 정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여인들에게 늘상 둘러쌓인 왕들에게나, 역사적으로나 후궁의 죽음은 그리 큰 슬픔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의빈 성씨가 죽었을 때 국사를 의탁할 때가 없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의빈 성씨의 죽음을 많이 안타까워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국사라는 뜻은 의빈과 나랏 일을 의논했다기 보다는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물론 뱃 속의 태아가 원자일 가능성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잠시 칠궁에 대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자면 칠궁은 조선시대 왕을 낳은 7명의 후궁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궁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 이 칠궁은 원래 영조가 숙빈최씨의 사당으로 세웠으며 영조 20년 1744년
3월에 육상묘로, 영조 29년 6월 25일에 육상궁, 대한제국 때에는 육궁, 1929년부터는 칠궁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왕이 되지 못했고 의빈 성씨는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니다 . 하지만 의빈 성씨는 정조대왕의 특별한 배려로 의빈궁에 신위를 모시게 되었으며 고정 7년에 칠궁에 속하게 된 것이다. 출처)청와대와주변 역사문화유산 바로알기
의빈 성씨의 신위는 순종 1년(1908 7월 23일 )
"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는 제사제도 칙령에 따라 의빈 성씨 묘소에 매안 즉 매장하게 된다.
의빈성씨 그 세번째 이야기
'이러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이폰 3G 발표 스티브잡스 동영상 (0) | 2008/06/10 |
|---|---|
| [드라마 이산] 의빈성씨 그 세번째 이야기 (0) | 2008/06/09 |
| [드라마 이산] 의빈성씨 그 두번째 이야기 (0) | 2008/06/09 |
| 디자인에 영감을 얻기위해 방문하면 좋은 장소 10곳 (0) | 2008/06/05 |
| 온라인 동영상으로 영어 청취 능력을 향상시키자- yappr (14) | 2008/05/22 |





댓글을 달아 주세요